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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인생이 궁금하다.

 

시작은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나서 였다. 나는 그 소설을 읽기 시작하자 이야기에 깊이 빠져 단숨에 읽어내려 갔는데, 주인공에게 나를 깊이 투영했던 것 같다. 아내와 자식이 있고, 번듯한 금융권 직장이 있는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인 그가, 마음 속에 타오르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져버릴 수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림을 시작하여 궁핍하고 초라한 삶을 살다 결국 남태평양 어느 섬에서 알아주는 이 없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결국에는 위대한 그림을 그리게 되는 이야기였다. 서머셋 몸이 폴 고갱의 인생을 모티브로 해서 그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알게되자, 나는 폴 고갱의 실제 삶은 어떠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고갱, 고귀한 야만인(Gaoguin, "Ce malgré moi de sauvage")

 

그와 관련된 책들을 검색하다 이 책을 알게됐다. 시공사 디스커버리 시리즈 중 하나로 나온 책인데, 작고 얇아 입문용으로 좋을 것 같았다. 이 책은 오르세 미술관의 감독이자 국립 미술관의 행정 감독관인 프랑스아즈 카생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고갱의 유년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일생은 간략하게 설명하고, 고갱의 여러 작품들과 관련 사진들을 대부분 컬러로 싣고 있다. 뒷 부분에는 고갱의 편지와 지인들의 기록들도 담겨있었다. 다른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생소한 지명, 등장인물, 미술사 용어들에서 약간의 어려움을 느낀 지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월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고갱의 인생과 작품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으로 입문해봐도 좋을 것 같다.

 
 

숫자로 보는 고갱
  • 55세 : 1848년 6월 7일 출생 ~ 1903년 5월 8일 사망
  • 160cm : 고갱의 신장. 큰 키는 아니었다.
  • 5명 : 증권거래소에서 주식거래인으로 일하던 그는, 1873년 메테 가트라는 덴마크 여성과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 1883년 : 이전까지 주식거래인과 화가생활을 병행하던 그는,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 붕괴로 실직 후, 이듬 해에 전업화가의 길을 걷는다. 그해 11월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파리를 떠나 생활비가 적게드는 루앵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생활고에 아내는 6개월 만에 떠났다고 한다.
  • 75점 : 가족들과 떨어져 생활하게 된 고갱은 1887년 남태평양 섬에 머물렀는데, 파리로 돌아와서 1888년 한 해 동안에만 75점의 그림을 그렸다. 꾸밈없는 원시성을 갈망하고, 야만인(barbarian)으로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던 고갱은 이 때 남태평양에서 엄청난 영감을 얻었던게 아닌가 싶다.
  • 1895년 : 고갱이 최후의 남태평양행을 떠난 해이다(다시 돌아오지 못했기에). 이전에는 원시성을 찾아 순수함을 그리고 인정을 받겠다는 의기양양함이 있었다면, 이번 여행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파리로부터의 일종의 도피(책에서는 스스로 떠난 유배라고 했다.)같은 느낌으로 떠난 것이었다. 당시 고갱은 병고와 술과 절망에 쩌들어있었고, 울면서 떠났다고 한다.
  • 1,000프랑 : 1900년 당시 고갱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외 8점이 팔린 가격이다. 이 가격을 듣고 고갱은 무척 실망했다고 한다. 당시 남태평양 생활비로 한 달에 300프랑을 후원받게 되서 고갱이 좋아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 1,000프랑의 가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너무 시대를 앞 서 갔었나보다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고갱은 소설 속 스트릭랜드와 얼마나 닮았나?

 

이 책을 통해 고갱의 실제 인생을 들여다본 결과, 정말 많은 부분이 비슷했다. 스트릭랜드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금융권에 종사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전업화가로 전향했고,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생활고를 겪으며 그림을 그렸고, 남태평양 타히티에서 그의 예술을 완성시키다 거기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전업화가의 길을 걷게된 계기와 과정이었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는 스트릭랜드가 한창 안정적인 시기에 스스로 모든 것(성공한 일자리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을 버리고 가족들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났다.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소설에서 가족들과 화자는 물론, 독자들도 스트릭랜드가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처럼 바람을 피워 다른 여자와 도피한 것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파리의 남루한 여관에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그림만을 그리고 있는 스트릭랜드를 마주했을 때 극적인 반전은 그의 예술혼을 더욱 더 숭고하게 느껴지게 했다.
그래서 실제 폴 고갱도 이런 극적인 과정이 있었던 것인지 더 궁금했었다. 나는 이것이 한편으론 새삼 다행으로 느껴졌는데, 고갱은 가족을 버리지 않았고, 전업화가로 들어선 계기도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로 실직을 하게 되어서였다. 그러나 주식거래인으로 빨리 자리를 잡았던 것처럼 화가로서 단기간에 성공할 수는 없었고, 갑작스러운 생활고에 아내는 6개월만에 가정을 떠났다고 한다.(그렇다고 이혼을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고갱은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것 같고 홀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고갱은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몇 차례 남태평양 여행으로 영감을 받고, 파리에 돌아와서 작품 홍보를 위한 활동들을 한 것 같다. <노아 노아>(타히티 말로 '향기'), <마오리의 고대신앙>과 같은 필사본 책을 엮어낸 것도 본인의 작품이 좀 더 이해받기 원해서였다. 반면 스트릭랜드는 남태평양으로 떠나 쭉 거기 정착했던 것 같다. 
 

마치며

 
이 책을 통해 고갱의 유년시절부터 말년까지 훑어볼 수 있었다. 미술품 수집에서 부터 시작해서 그의 삶을 걸고 예술을 갈망하기까지, 그의 인생 자체가 극적이고 숭고하게 느껴졌다. 생전에는 큰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원시적이고 순수한 어떤 것을 추구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훗날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같은 거장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한다. 오롯이 한 길을 걸어간 거장의 인생은 그 자체만으로 큰 감동과 울림이 있는 것 같다. 좀 더 알고 싶은 폴 고갱! 나중에 고갱의 작품들에 관해서도 포스팅으로 다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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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 시즌1, 2화 줄거리 시작합니다!
 

Season 1  #Episode 2

 

출처: 공식 트레일러

메이블은 찰스가 주연했던 브라조스 드라마를 보면서 팀 코노의 얼굴을 그린다.  그런데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 브라조스 형사는 부모님과 유년시절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어제 찰스가 자기에게 했던 말과 토시하나 안틀리고 똑같이 말했다.

Let me tell you a little bit about my dad.
"You're the spitting image of your father."
And I was.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좀 해줄게.
"넌 정말 너네 아버지랑 판박이야."
(라고 사람들이 말했고) 난 정말 그랬어.

어제 진솔하게 자기 이야기를 해준 것에 감동을 받아 메이블도 마음을 열고 자기 이야기를 했던건데, 그게 드라마 대사였다고? 찰스가 나에게 거짓으로 얘기한거였어? 메이블은 마음이 심란해진다. 

 
 

출처: 공식 트레일러


찰스와 올리버는 올리버 집에서 한창 팟캐스트를 녹음 중에 있다. 올리버는 찰스의 나레이션을 디렉팅하며 이렇게 말한다.

I literally feel myself aging when I listen to you.

네 말(나레이션)을 듣고 있자니 문자그대로 내가 다 늙는 것 같아.
메이블이 거기로 들어온다. 
 
 

출처: 공식 트레일러

셋은 팟캐스트의 방향성에 대해 얘기한다. 디렉터 올리버는 팀 코노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데 정보가 너무 없어 아쉬워한다. 

Our podcast is never going to pop until we know who is Tim Kono.
Look, every great episode 2 always makes you care deeply for the victim.
You either make them sympathetic or sexy or intersting, none of which, I feel for Tim Kono.

우리 팟캐스트는 팀 코노가 누구인지 알 때 까지 절때 뜰 수 없어.
봐봐, 모든 좋은 두번째 에피소드는 항상 너희가 희생자를 깊이 공감하게 만들어.
감정 이입이 되든가, 섹시하든가, 흥미로워야 하는데 나는 팀 코노에게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
 

 

메이블은 최근 팀 코노와 했던 대화를 회상한다. 왜 이제와서 어릴적일을 끄집어 내냐고, 화를 내는 팀에게 메이블은 오스카가 이제 곧 나온다고 얘기해달라고 사정한다.

You can make things right.
You know what happened that night.
You didn't even say anything.

네가 이 일을 바로잡을 수 있어.
너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잖아.
그런데도 넌 아무 말도 않했어. 

그러나 팀은 계속 거부하고, 우린 이제 서로 모르는 사이일 만큼 달라졌으니 앞으로 아는 체 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팀과 메이블은 10년 전 그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출처: 공식 트레일러

메이블은 찰스와 올리버에게 팀 코노의 추모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들은 뭐라도 알아내고자 추모식에 참석하기로 한다. 그런데 모인 주민들은 하나같이 팀 코노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는다.

He ruined Christmas!
He once yelled at me for smoking outside!

그가 크리스마스를 망쳤어요!
그는 밖에서 담배핀다고 나에게 소리쳤었어요!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고 있던 하워드란 주민이 있어서 팀 코노와 가까운 사이냐고 물었더니, 어젯밤 키우던 고양이 에블린이 죽어서 우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주민들은 화단을 망치고 돌아다녔다는 그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매우 안타까워하고 슬픔을 공감해줬다. 팟캐스트 탐정단 셋은 팀 코노가 고양이만도 못한 사람이었다며 별 소득없이 돌아간다. 그리고 입주민 대표인 버니는 올리버에게 관리비가 8개월이나 밀렸다고 경고한다.

 
 

출처: 공식 트레일러

집으로 돌아온 메이블은 한 때 절친이었던 팀 코노를 향한 사람들의 반응에 심란하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팀 코노는 누구인가'에 대한 영상을 녹화해두기로 한다.

It's true, Tim didn't get along with a lot of people.
He was direct, but he never lied.

팀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직설적이긴 했지만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메이블과 팀 코노는 어렸을 때 이 곳 아코니아에서 만났는데, 팀은 직설적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진 못했지만 절대 거짓말은 안했다. 그래서 팀을 좋아했고 하디보이즈를 결성해서 함께 어울렸다. 몇 년 후엔 오스카와 조이가 합류했다. 오스카는 경비원의 아들이어서 다른 방에 들어갈 수 있는 키를 가져왔다. 넷은 아코니아 내에 빈 집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가끔 조이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끝이 오기 전까지는.

 
 

출처: 공식 트레일러

올리버와 찰스는 건물 관리인인 어슐라에게 팀 코노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보려고 했다. 어슐라는 팀 코노에게 들어왔던 민원파일을 건네주고, 내일이면 팀 코노의 집은 다 치워지고 없을 거라고 한다. 이 정보를 들은 올리버와 찰스는 메이블을 데리고 팀 코노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수색을 시작한다.

Put on these booties. It'll keep you from slipping.

이 발싸개를 신어. 그러면 안 미끄러질거야.
*keep from : -하지 못하게 하다.
 

출처: 공식 트레일러

메이블은 팀 코노의 방에서 하디보이즈와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파티를 위해 한껏 차려입은 네 명은 기념사진을 찍는다. 여기서 1화에 나온 고래 문신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건 하디보이즈 친구들끼리 같이 했던 문신이었다. 그날 옥상에서 파티를 했는데, 메이블은 조이와 오스카가 다투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잠시 후에 조이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I saw someone fighting with her.

누군가 그녀랑 싸우는 것을 봤어.

팀은 조이가 누군가와 싸우는 것을 봤다고 했고, 그게 오스카는 아니었다고 했다. 메이블은 팀에게 누구를 본 거냐고, 경찰이 오스카를 잡아가니 이야기해달라고 사정했지만 팀은 외면했다.

 

팀 코노의 방에서 몇 가지 단서들을 찾은 이들은 올리버 집으로 갔다. 팀이 죽은 뒤, 하워드의 고양이인 에블린이 그 집에 왔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천식이 있었고, 섹스토이들을 갖고 있고, 사람들이 안좋아했고..등등. 이런 얘기들을 늘어놓자 메이블은 그만 하라고 했다.

Can we not? 
I don't think being unlikable means he deserved to die.

그만 하면 안될까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죽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팀을 추적하며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메이블은 정색을 하고, 마침내 찰스에게 까칠하게 대했던 이유를 말한다. 부모님에 대해 자신에게 한 말이 브라조스 대사였던 걸 알고 있다고 한 것이다. 찰스는 그 대사는 자기가 직접 쓴 거였고, 진짜 자기 이야기였다고 해서 겨우 오해를 풀었다.

 

출처: 공식 트레일러

이후 메이블은 홀로 팀의 집에 다시 갔다. 그의 책꽂이에 여전히 하디보이즈 책이 수십권 꽂혀있는 것이 맘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열어보니 책이 아니라 보석류들을 은닉해둔 장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책 으로 위장한 상자에서 반지, 보석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또 한권의 책 속에는 예전에 메이블이 그려줬던 그림도 보관되어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온 메이블은 'Who is Tim Kono?'에 대한 영상을 마저 녹화했다. 메이블이 알던 팀과 현재 추적해본 팀은 너무 달랐다. 그래서 메이블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Tim was the kind of guy that always made the sensible choice.

That's why none of this makes sense.

팀은 항상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것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그는 관찰력이 있었고, 로봇같은 면도 있었지만 친절하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조이가 죽었던 때만 빼고. 

 
팀은 왜 보석들을 숨겨놨을까? 훔친걸까? 무슨 검은 조직에라도 가담했다가 죽게된 건 아닐까? 아니면 10년 전 조이가 죽은 일의 전말을 알고 있어서 살해당한 걸까? 너무 위험해서 메이블에겐 얘기해주지 않은걸까? 메이블은 혹시 다음 타겟은 자기가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네요. 
갈 수록 새로운 궁금증을 유발하는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 아주 흥미진진해지네요!
 

세 줄 요약
  • 주인공 셋이 피해자 팀 코노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하여 알아낸 것은 사람들은 그를 안좋아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고, 혼자였고 등등 별로 좋지 않은 내용들 뿐이었다.
  • 메이블은 어렸을 때 팀 코노 뿐 아니라 오스카, 조이라는 또래 친구들과 하디보이즈를 결성했는데, 옥상에서 파티를 하던 어느 날 조이가 떨어져 죽었고 팀 코노는 그 직전 조이가 누군가와 싸우는 것을 봤음에도 함구해서 결국 조이의 남친이었던 오스카가 잡혀갔다.
  • 메이블은 홀로 팀 코노의 집을 다시 조사하는데, 그가 책꽂이에 많은 양의 귀금속들을 숨겨둔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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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우리집 강아지는 집에서는 용변을 보지 않는다. 밖에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한없이 용변을 참다가, 참다가 점점 '똥 마려운' 개가 된다. 눈 내린 후 정말정말 추웠던 그 날 밤에도 산책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그 날 낮에 일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왔는데 눈 쌓인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모자, 장갑, 마스크에 겹겹이 껴입고 나섰음에도 눈썹이 얼만큼 추웠었다. 집에서 몸 좀 녹이고 나가야지 하던 게 계속 밍기적거리다가 어스름해져서야 산책나갈 채비를 했다.
 
우리 강아지는 옷이라면 무지하게 귀찮고 싫어하는데 그 날 만큼은 억지로 패딩을 입혔다. 밖에 나오니 기분이 좋은지 신이나서 나를 끌고간다. 강아지는 발도 안시려운가보다. 쌓인 눈이 곳곳에 얼음이 되어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났다. 그런 최강튼튼 강아지 발바닥도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염화칼슘이다. 눈이 내리면 누군가 수고하여 자동차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 곳곳에 염화칼슘을 뿌려준다. 내린 눈이 제때 녹지 않아 얼어버리면 사고위험이 높으니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필요하고 유익한 물질이고, 또한 그것을 뿌려준 누군가의 수고는 얼마나 고마운가.
 
그런데, 이 길에 뿌려진 염화칼슘이 잘 녹아서 없어지면 괜찮은데, 길 가 곳곳에 알갱이가 그대로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강아지가 발을 디디기라도 하게되면 무척 고통스러워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염화칼슘을 맨발로 밟으면 강아지는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우리 강아지가 더 아기였을 때는, 눈 내린 후 산책하다가 염화칼슘이 닿았는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걷지를 못해 집까지 안고 온 적도 있었다. 이런 저런 경험이 있다보니 눈 온 다음에 산책할 때는 길에 염화칼슘 남아있는게 있나없나 매의 눈으로 살피게 된다. 그 날도 그렇게 살피면서 강아지가 염화칼슘이 있는 쪽으로 갈라치면 줄을 잡아당기고, 너무 많이 남아있어 피할 수 없는 길목에는 잠시 안아서 이동하며 조심조심 산책을 시작했다. 
 
한강 산책로에 접어드니 염화칼슘이 남아있는 곳이 확연히 적어져서 좀 안심하고 걷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킁킁 냄새를 맡으며 아스팔드 산책로 가장자리 풀이 돋아난 곳으로 가까이 가더니만 갑자기 어쩔 줄 몰라하며 다리를 벌벌벌벌 떨면서,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소복히 눈만 쌓여있어 보였는데, 거기 염화칼슘이 있었나보다. 고통스러워하는 강아지가 불안하고 안쓰러워 재빨리 안아들고 발바닥을 손으로 탁탁탁탁 털어주고 깨끗한 길에 내려줘봤다. 강아지는 다행스럽게 이내 진정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반면에 나는 또 이런 일이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아스팔트길로 가지 않고 눈 쌓인 흙길로만 걷기 시작했다. 이 쪽 길에는 염화칼슘이 없어서 그런가 걸을 때마다 쌓인 눈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눈 밟는 소리가 정겨웠다. 조금 더 가면 넓은 풀밭이 펼쳐지는데 이 곳은 흙 냄새와 풀 냄새를 좋아하는 우리 강아지가 평소에 좋아하는 장소다. 
 
이 곳에 도착해서 걷다보니 소복한 눈 사이로 이곳 저곳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자세히 보니 누군가 수고스럽게 비질을 해서 만들어둔 것이었다. 그것도 한 두 군데가 아니고, 여기 저기 길이 나있었다. 눈이 녹아 없는 곳에는 혹 염화칼슘이 남아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걷던 나는 그 곳에선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 눈이 쓸린 자국을  가만히 보니 사람이 손수 쓸었을텐데 이렇게 길을 내려면 비질을 몇번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빗자루를 잡고 참 고생하셨을 그 분의 수고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는 눈이 내리면 집 앞에 눈을 쓰는 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통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빗자루로 쓸어낸 길을 마주하니, 염화칼슘에서는 느낄 수 없는 레트로 갬성돋는 반가움이 있었다. 강아지가 아니었으면 무심하게 넘어갔을 길이었겠지만, 누군가의 수고를 알아보고 고마워할 수 있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산책이었다. 비록 얼굴을 후려치는 강 바람은 매서웠지만 말이다.

선명한 빗자루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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