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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우리집 강아지는 집에서는 용변을 보지 않는다. 밖에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한없이 용변을 참다가, 참다가 점점 '똥 마려운' 개가 된다. 눈 내린 후 정말정말 추웠던 그 날 밤에도 산책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그 날 낮에 일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왔는데 눈 쌓인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지만 모자, 장갑, 마스크에 겹겹이 껴입고 나섰음에도 눈썹이 얼만큼 추웠었다. 집에서 몸 좀 녹이고 나가야지 하던 게 계속 밍기적거리다가 어스름해져서야 산책나갈 채비를 했다.
 
우리 강아지는 옷이라면 무지하게 귀찮고 싫어하는데 그 날 만큼은 억지로 패딩을 입혔다. 밖에 나오니 기분이 좋은지 신이나서 나를 끌고간다. 강아지는 발도 안시려운가보다. 쌓인 눈이 곳곳에 얼음이 되어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났다. 그런 최강튼튼 강아지 발바닥도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염화칼슘이다. 눈이 내리면 누군가 수고하여 자동차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 곳곳에 염화칼슘을 뿌려준다. 내린 눈이 제때 녹지 않아 얼어버리면 사고위험이 높으니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필요하고 유익한 물질이고, 또한 그것을 뿌려준 누군가의 수고는 얼마나 고마운가.
 
그런데, 이 길에 뿌려진 염화칼슘이 잘 녹아서 없어지면 괜찮은데, 길 가 곳곳에 알갱이가 그대로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강아지가 발을 디디기라도 하게되면 무척 고통스러워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염화칼슘을 맨발로 밟으면 강아지는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우리 강아지가 더 아기였을 때는, 눈 내린 후 산책하다가 염화칼슘이 닿았는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걷지를 못해 집까지 안고 온 적도 있었다. 이런 저런 경험이 있다보니 눈 온 다음에 산책할 때는 길에 염화칼슘 남아있는게 있나없나 매의 눈으로 살피게 된다. 그 날도 그렇게 살피면서 강아지가 염화칼슘이 있는 쪽으로 갈라치면 줄을 잡아당기고, 너무 많이 남아있어 피할 수 없는 길목에는 잠시 안아서 이동하며 조심조심 산책을 시작했다. 
 
한강 산책로에 접어드니 염화칼슘이 남아있는 곳이 확연히 적어져서 좀 안심하고 걷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킁킁 냄새를 맡으며 아스팔드 산책로 가장자리 풀이 돋아난 곳으로 가까이 가더니만 갑자기 어쩔 줄 몰라하며 다리를 벌벌벌벌 떨면서,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소복히 눈만 쌓여있어 보였는데, 거기 염화칼슘이 있었나보다. 고통스러워하는 강아지가 불안하고 안쓰러워 재빨리 안아들고 발바닥을 손으로 탁탁탁탁 털어주고 깨끗한 길에 내려줘봤다. 강아지는 다행스럽게 이내 진정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반면에 나는 또 이런 일이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아스팔트길로 가지 않고 눈 쌓인 흙길로만 걷기 시작했다. 이 쪽 길에는 염화칼슘이 없어서 그런가 걸을 때마다 쌓인 눈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눈 밟는 소리가 정겨웠다. 조금 더 가면 넓은 풀밭이 펼쳐지는데 이 곳은 흙 냄새와 풀 냄새를 좋아하는 우리 강아지가 평소에 좋아하는 장소다. 
 
이 곳에 도착해서 걷다보니 소복한 눈 사이로 이곳 저곳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자세히 보니 누군가 수고스럽게 비질을 해서 만들어둔 것이었다. 그것도 한 두 군데가 아니고, 여기 저기 길이 나있었다. 눈이 녹아 없는 곳에는 혹 염화칼슘이 남아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걷던 나는 그 곳에선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 눈이 쓸린 자국을  가만히 보니 사람이 손수 쓸었을텐데 이렇게 길을 내려면 비질을 몇번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 빗자루를 잡고 참 고생하셨을 그 분의 수고가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는 눈이 내리면 집 앞에 눈을 쓰는 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통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빗자루로 쓸어낸 길을 마주하니, 염화칼슘에서는 느낄 수 없는 레트로 갬성돋는 반가움이 있었다. 강아지가 아니었으면 무심하게 넘어갔을 길이었겠지만, 누군가의 수고를 알아보고 고마워할 수 있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산책이었다. 비록 얼굴을 후려치는 강 바람은 매서웠지만 말이다.

선명한 빗자루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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